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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 3사자(倉洞 三獅子)”를 만나다
역사문화 발자취 / 광복 74주년 특집

도봉구 평생학습 서포터즈 조수봉 기자

창동(倉洞), 항일 역사를 간직한 동리(洞里)!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京畿道 楊州郡 蘆海面 倉洞里)! 지금의 도봉구 창동의 옛 지명이다. 이 중 노해면(蘆海面)은 조선 시대의 경기도 양주목 노원면(蘆原面)과 해등촌면(海等村面)이 1914년에 통합되면서 생긴 행정구역 명이며 창동은 옛 조선 시대 양곡 창고가 있었다 하여 ‘창골’로 불리었던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현재 도봉구는 서울특별시의 25개 자치구 중 북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봉1·2동, 방학1·2·3동, 쌍문1·2·3·4동, 창1·2·3·4·5동 등 모두 14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도 창5동 소재 창동초등학교를 지나는 길가에 마모된 옛 이정표와 1995년 새롭게 조성한 이정표가 나란히 서서 이곳이 옛 ‘창동리’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창동리(倉洞里) 이정표
▲ ‘창동리(倉洞里)’ 이정표


창동 3사자(倉洞 三獅子)

‘창동 3사자’란, 일제강점기 일본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 도봉구 창동)에 은거하며 항일 및 근현대 우리나라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던 가인 김병로, 고하 송진우, 위당 정인보를 일컫는 말이다. 현재는 ‘도봉을 빛낸 근·현대사 인물을 주제로 도봉구의 역사성을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리고, 주민들의 자긍심 고취 및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된 창동역사문화공원을 방문하면 동상으로 조성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창동역사문화공원의 3사자 상
▲ 창동역사문화공원의 3사자 상
(좌로부터 가인 김병로, 고하 송진우, 위당 정인보)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7~1964)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의병과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으로 사법부 발전을 위해 애쓴 인물이다. 그는 담양 용추사(龍湫寺)에서 항일운동가 최익현의 열변에 감동을 받은 뒤 1906년 동지들을 모아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면서 항일의 길로 들어선다. 일본 유학 후 1915년 귀국하여 강단에 섰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잠시 판사를 거쳐 변호사를 개업, 이때부터 크고 작은 시국사건에 무료로 변론을 맡아 항일운동을 지원한다. 그는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34년 창동리로 이주하여 농촌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자 정인보, 송진우,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까지 김병로를 따라 창동리로 이주하여 창동리는 일약 독립운동가들의 은거지가 된다. 일제는 이들을 요시찰인물로 지정하고 양주경찰서에 고등계를 신설할 정도였다. 창동에는 김병로의 호(號) ‘가인(街人)’을 딴 ‘가인초등학교’와 ‘가인지하차도’ 등이 있다.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는 중앙학교 교장으로 3·1운동의 기틀을 닦았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과 언론을 통한 민족 지도자였다. 1918년 말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김성수, 현상윤, 최린, 최남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일 방안을 논의했고, 3·1운동으로 결실을 보았으며, 3·1운동을 주동한 48인 중 한 명으로 구속되어 1년 반 동안의 옥고를 치른다. 1921년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그 후 1940년 폐간될 때까지 20여 년 동안 사장, 고문, 주필 등을 역임하며 일제의 압제를 무릅쓰고 『동아일보』를 민족의 대변지로 이끌었다. 1920년대에는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을, 1930년대에는 문맹 퇴치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동아일보 사장 시절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보도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킨다. 광복 후 반탁을 강력히 주장한 임시정부요인들과는 달리 ‘신중한 반탁론’을 펼치다가 1945년 12월 30일 한현우 등의 총격을 받고 피살된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1950)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며 한학자이다. 한일병합조약 직후 상해(上海)로 건너가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한학과 역사학을 가르쳤으며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그 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창동리에 은거한다. 1947년에는 국학대학 학장, 이승만 정부에서의 초대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 6·25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 ‘삼일절 노래’, ‘제헌절 노래’, ‘광복절 노래’ 등의 작사가로도 유명하다.

- 창동역사문화공원 설명문 참조 -


이제 이들은 없지만 사람들은 한평생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며 한 지역에서 함께 한 이들을 일컬어 ‘창동의 세 마리 사자(獅子)’라 부른다. 그리하여 지금도 창동역사문화공원을 지키며 옛 창동리에서의 나라 위함을 후세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창동 3사자’의 옛집 터

창동 3사자 가인 김병로의 옛집 터
▲ 가인 김병로: 현 도봉로134길 14(창희빌리지)

창동 3사자 고하 송진우의 옛집 터
▲ 고하 송진우: 현 도봉로136가길 69(삼풍상가)

창동 3사자 위당 정인보의 옛집 터
▲ 위당 정인보: 현 도봉로595-1(중앙 흰색 건물)


‘창동 3사자’를 만나는 방법

‘창동 3사자’는 도봉구민회관(도봉구 도봉로 552/☎02-901-5160) 옆에 조성된 ‘창동역사문화공원’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또는 도봉문화원(www.dobong.or.kr/☎02-905-4026)에서 진행 중인 ‘토요탐방 도봉기행’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된다.



[2019-08-27, 17: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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